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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2023-10-24 큐티말씀 - 하나님께 향한 소망(행24:10-23) - 김도완목사

사무간사22023.10.28 21:59조회 수 8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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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행24:10-23

제목:하나님께 향한 소망

 

 어제 주한길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로마 총독에게 잡혀있는 바울을 벌하고자 유대인들은 더둘로라고 하는 변호사까지 세워 바울을 고소하고 잡아 죽일려는 시도를 합니다. 어제 유대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한 죄명은 선동죄였습니다. 사도바울을 “trouble maker”라고 말합니다. 어디서나 이 사람만 있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는 로마정부의 치안 문제, 안보 문제에 걸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닙니까? 따라서 이런 사람은 없애야 로마의 충신이겠죠? 그런 뜻으로, 마치 로마정부를 생각해서 말하는 것처럼, 로마 정부의 치안문제를 염려해서 말하는 것처럼요. 그들은 지금 바울의 일을 정치 문제로 돌려서 중앙에 진출하려는 정치적 관심으로 차 있는 벨릭스를 선동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을 가리켜 선동자라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주동자라고, 이런 사람 내버려두면 세상이 소란스러워진다고, 혁명이 일어난다고, 폭동이 생긴다고, 그러니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벨릭스를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사도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데요 이 총독은 로마를 대신하여 사실상 법적으로 사형을 선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할 권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죽이기로 작정하고 로마사람들에게 넘겨서 사형케 할 수는 있지만 사형에 대한 권한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도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아 사형 선고와 함께 곧 집행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에 지금 벨릭스 앞에 섰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선 것과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에 바울의 생사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이렇듯 절박한 재판정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는 대로 바울은 담대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인가 결단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그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네가 로마로 가리라”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과 또 자기를 담대케 하시던 성령의 역사와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자 앞에서 재판 자체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여기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난은 좀 당하겠고, 매도 맞겠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로마로 간다고 하셨으니까 내가 죽을 곳은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담대합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전신갑주에 구원의 투구가 있는데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았으니 머리는 보호 받을 수 있으니 생명은 건졌으니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담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어제 바울을 고소하는 이들 조차도 바울을 죽일만한 근거가 없음을 우리는 어제 본문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더둘로라는 변호사, 그리고 같이 온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바울을 고발하며 그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지만, 벨릭스 총독은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자신을 고발한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동안 잠잠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던 바울은 기회가 주어지자 오히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쁨으로 자신이 해왔던 일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먼저 바울은 10절 하반절에서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바울은 벨릭스가 오랫동안 사마리아에서 총독을 지냈고, 예루살렘에서도 총독을 지냈고, 이제 가이사랴에 있어서 이 지방을 이렇듯 오랫동안 다스렸으니 우리 종교 문제나 바울이 처한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인 22절은 벨릭스가 이 도와 관련된 일을 잘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이 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총독 벨릭스는 그동안 유대교 내에서 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들이 그렇게 과격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지금 유대인들이 제기하고 있는 사건이 법률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시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말합니다.'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고발한 사람들이 고발한 내용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우선,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한지 12일 밖에 되지 않았고 그리고 예루살렘 어디에서도 사람들을 모아서 선동을 하거나 연설을 하지 안았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고백이 변명이라는 형식을 빌어 복음을 전하는데요. 다만 나는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도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단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데 이 소망은 유대인들도 똑같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대망 사상. 그 메시야가 우리 구원자 이 구원자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 유대사람들이 오래 기다려왔던 그리고 구약 성경과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해온 그 소망이 자신이 바라는 소망이 같은 한 소망임을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향한 소망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려고 노력했음을 말합니다. 동시에 바울이 얼마나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17절에서 말합니다. 바울은 이방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를 말하는데요. 그것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전하려고 이방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을 위해 귀국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행한 것은 성전에서의 정결예식이었죠? 이것은 유대인으로서 지켜야할 것을 하는 의미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작당하거나 소동을 일으킨 적 없었고 오히려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 사람들이었음 또한 재판정에서 밝힘으로 바울은 이런 유대인들과의 갈등은 종교적인 부분일 뿐이지 정치 사회적인 것이 아님을 말하며 로마시민인 자신에게 법적으로 처벌받을 것이 아님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바울의 자기 변론은 끝이 납니다.

 이로서 벨릭스는 바울을 고소하는 유대인들과 자기를 변호하는 바울.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이제 모든 결정은 벨릭스 총독에게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이 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총독 벨릭스는 그동안 유대교 내에서 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들이 그렇게 과격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지금 유대인들이 제기하고 있는 사건이 법률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시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는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잘못된 결정을 하고 마는데요. 예수님이 무죄했다면 어떤 정치적 부담을 가진다고 해도. 설사 자기가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날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진리 편을 들었어야 했지만 벌써 두 번이나 일어난 유대인들의 폭동 그리고 황제의 경고 때문에 마지못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으라고 했던 그 잘못된 과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이 두 가지 결정을 합니다. 우선은 천부장이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는 것이고, 분명 바울이 무죄인 것 같기는 하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무죄라는 판결로 인한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오늘 벨릭스는 사실상의 무죄판결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바울에 대한 처우가 그것을 잘 드러냅니다. 오히려 백부장에게 명령하여 바울에게 자유를 주고 친구들이 바울을 돌보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함으로 벨릭스는 당장의 판결을 유보해 버립니다. 별도의 처벌이 없고, 가택에 연금하긴 했지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바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만큼의 호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자기 변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변명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고난을 당해도 좋다. 심지어 재판이 어떤 모습으로 결론이 내려도 괜찮다. 상관없다. 그가 지금 의도하는 바는 오직 복음이라는 이 한 가지 연유로 고난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이라면 다 좋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이게 어떻게 사도 바울만의 변명이고 고백이어야 겠습니까? 구원 받은자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고백의 이 삶의 자세가 우리들의 고백이자 태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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