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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2014-12-18새벽설교- 방언의 사용2-성령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라(고전14:14-40)

최민환2015.11.25 12:57조회 수 146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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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언어”라는 책을 쓴 김우현감독(팔복영화제작)이란 사람은 사도바울이 고전14장을 기록한 이유가 모든 사람이 방언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또 방언이 너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교회에 덕을 세우지 않는 성도들을 책망하기 위해 본문을 기록했다. 은사에 대한 오해는 필연적으로 성령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다. 성령사역이 무슨 뜻인가? 교회사역중에 성령사역이 아닌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는가? 오늘날 성령하나님에 대해 심각한 오해가 많다. 방언을 통해 본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무엇인가?

 

 

첫째, 성령님은 지성(지혜)을 무시하신다?

본문 14-15절을 읽어보자./여기서 나의 영은 영어로“my spirit”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내 속에 있는 성령이 정확한 해석이다. 어제 방언이 뭐라고 말씀드렸는가? 내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방언이다./즉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말씀드렸다./만약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내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통역할 때 예언과 같은 레벨이 될수 있는가?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내 영혼이 기도하는 것을 통역하면 하나님의 계시와 맞먹는 레벨이 되는가? 안된다./

 

▶콜린 브라운 같은 어떤 신학자는 방언이 사람의 영이 하는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방언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통역은 그 방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영으로 기도한다는 말도 맞고, 방언이 통역되면 예언같은 기능이 있다는 말도 맞아들어간다는 것이죠./그러나 그러면 그게 통역인가? 아니죠? 그건 통역이 아니라, 계시 또는 분별이다. 통역이란 번역이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도록 말을 해석해주는 것이 통역이다. 만일 그들 말대로 통역이 그런 거라면 방언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방언이 통역되었을 때에 예언같은 레벨이 된다는 것은 방언의 내용 때문이지, 통역 때문이 아닌 것이다.

 

==> 더군다나,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제외하고는, 어느곳에서도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나누어 설명한 곳이 없다. 성경은 마음과 영혼을 나누지 않는다./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영”은 우리안에 계시는 성령이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에는 약점이 존재하는데, 기도하는 내가 무슨 기도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성령이 내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내게 유익은 있으나, 나는 무슨 기도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나의 이성은 작동하지 못한다”(공동번역성경) 그래서 바울은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 바울은 "지성없는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사람이다. 20절을 읽어보자. 바울은 지혜를 말한다. 여기서 지혜는 “분별력”을 말한다. 성도는 지혜, 지성을 배제한 신앙생활을 하면 안된다. 그것은 신앙을 "유아기"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성도는 분별력없는 생활을하면안된다. 바울은 성도가 방언하는 동안 분별력 없이 무의식 속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당시 고린도에는 두 종류의 방언이 존재했다고 한다./하나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사인 방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방종교에서 행해지던 방언이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통역할수 있는 방언이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할수도 있고, 하지 않을수도 있는 "절제"가 되는 방언이었다. 그러나 이방종교에서 행해지는 방언은 통역이 안되는 방언, 즉 "의미없는 말들"이고, 또 절제가 안되는 "황홀경"속에 진행되는 방언이었다. 이 이방종교의 방언이 교회안으로 들어와 섞였다. 그래서 오늘날 방언을 가르친다는 방언운동가들은 이렇게 말하죠? “그것봐, 너가 정신차리고 기도하면 5분도 기도하기 힘들지? 그런데 영으로 하는 방언기도를 하면 1시간이 1분 기도한 것처럼 여겨지지?” 방언이 나오는대로 이성이 작동되지 않은채, 그냥 무의식적으로 있으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죠?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을 배격한다. 성령은 지성의 작동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그러면 마음으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방언으로 찬양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마음으로도 찬양하라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지혜, 지성과 상충하는가? 아니다./성령충만은 곧 지혜충만이다. 즉 분별력 충만이다. 성령충만할수록 지,정,의가 극도로 강해져서, 지적인 능력으로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은혜를 깨닫고, 말씀을 깨닫고,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흘리고, 또 철저히 회개한다. ==> 성령은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을 무시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성령님은 체험을 넘어서 나의 지성이 열매맺기를 원하신다.

 

둘째, 성령의 은사는 질서를 무시하신다?

▶토레이목사는 그의 책 "오늘날의 방언운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리라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 있으며 또한 주실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방언운동”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고 자기 책에 썼다.

 

==> 제가 토레이목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는 이유는 오늘날 방언운동이 방언에 대한 성경의 규례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27-28절은 방언을 할 때 차례를 따라 질서있게 하되,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개인적인 기도를 할 때만 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방언가르치는 자들은 통역없이도 그냥 하라고 가르친다. 예배시간에 방언을 단체로 하라고 한다. 그것을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 보면 뭐라고 한다구요? 23절에“미쳤다”고 한다. 또한 오늘날의 방언운동은 성경에 없는 내용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습과 훈련을 통해 방언을 얻을수 있다고 하죠?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말씀보다 체험이 앞섰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이 뭐라고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떤 체험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방언의 문제는 "말씀이냐 체험이냐" 사이의 문제이다.

 

==>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말씀이 아니라, 체험에서 찾고 있다. 제가 셀과 알파코스를 싫어하는 이유는 “복음만으로는 구원받을수 없다”는 토대위에서 성령사역이라는 것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기독교는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체험에 약하여, 말씀으로 해결 안되는 부분을 체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한번도 보여주시지 않은 능력이 바로 방언이다. 충만과 능력을 구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을 보여주신다. 체험이 말씀보다 앞서지 않게 하라.

 

==> 기억하라. 성령은 말씀에 위배하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성령은 말씀밖으로 나가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를 말씀안으로 인도하신다. 공예배에서 통역없이 방언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성경에 계시하셨다면, 성령은 그것을 어기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통역이 없는 예배시간에 방언을 참을수가 없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셨다?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닌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절제"이다. 방언은 예배시간에 할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을수가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은 결코 은혜니, 뜨거움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해 질서를 깨뜨리는 분이 아니다. 광란과 무질서는 오직 이방종교의 특징이다. 성령받았다고 개소리를 내고, 짐승소리를 내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 37절을 읽어보자./바울은 다른 어떤 서신서에서도 이렇게 무서운 글을 쓴 적이 없다. 이것은 이런 뜻이다. “스스로 잘난줄 아는 인간들아.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도, 스스로의 체험을 바탕으로 교만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명심해라. 나의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너희가 거절하는 것은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임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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