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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남원북철(눅17:7-10)

최민환2009.02.04 12:33조회 수 1813추천 수 171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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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북철(눅17:7-10)- 최민환목사

■ 남원북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위나라 사람 중에 계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남긴 이야기 중에 “남원북철”이라는 말이 있다. 단어적으로는, 수레의 끌채는 남쪽으로 향하고, 수레의 바퀴는 북쪽을 향한다는 말이다. < 어느 날 계량이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북쪽을 향해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계량이 물었더니, 그는 남쪽의 초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계량이 말하기를, '초나라로 간다면서 북쪽으로 가는 까닭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마차의 주인이 말하길, '제 말은 아주 잘 달립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량이 또 말했다. '말이 잘 달려도 이쪽은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그 사람은 '나는 돈을 넉넉히 가지고 있고, 마부가 마차를 모는 기술은 훌륭합니다.'라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마차는 점점 더 초나라와 더욱 멀어져 갔다.>

오늘날 남원북철이란 말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가리킬 때 쓰인다. 남쪽으로 간다고 하면서 북쪽으로 마차를 몰고 가면 아무리 열심히 간다고 해도 남쪽에 있는 목적지와는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목적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면서도 내가 지금 열심히 하고 또 능력도 있으니 언젠가 목적지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마차에 탄 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남원북철의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입로는 말하면서 밥을 두세그릇씩 퍼넣는 사람,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공부는 게을리 한 채 시간만 죽이는 학생,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씀씀이는 헤픈 사람, 이 모두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처럼, 남원북철하는 사람들이다. 누군들 그렇게 살고 싶겠는가?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지요.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삶속에는 그와 같은 남원북철하는 모습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오늘본문을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속에서도 남원북철하면서 잘못 가고 있는 모습을 깨닫게 해주는 세 가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 첫 번째로 본문에서 발견케되는 남원북철의 모습은 바로, 입으로는 종이라고 하면서 주인행세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는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겠다고 결단했었고, 또 기도할 때마다 수시로 “주여, 주여”하면서 우리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입으로 부르는 “주님, 주여”라는 호칭은 분명 예수님 당시의 “주님”과는 하늘과 땅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2000년전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 소유물에 불과했다. 주인이 종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었다. 주인이 종을 위해서 살지 않고, 종이 주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 우리에게는 조금 지나치게 보일지 모르는 주인의 태도를 종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은 우리가 종이며,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현대 크리스챤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되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우리 신앙이 기복주의 신앙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기복주의는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주기만 하면 그것이 장땡인 것이다. 어느덧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줘야 하는 분으로만 여겨지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입으로만 맨날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종처럼 살지 않고, 내가 주인처럼 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아마 여러분이 교회를 나온 동기는 모두 다를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얻기 위해 나왔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이유로 교회 문턱을 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여러분의 목적과 동기가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동기로 교회문턱을 넘었던지 간에, 결국 이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구원받아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죄에 종노릇 하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노예와 같은 두려움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께 즐거이 복종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전에 우리가 어떤 동기로 교회에 나왔든지 간에 이제는 우리의 목적과 동기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의 종이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종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도리어 우리를 섬겨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원하여 주님의 종이 되기를 워한다. 여러분도 더 이상 헤매지 말고 종다운 종으로 사사길 바란다.
(신앙생활은 누가 주인이냐의 싸움이다./ 노비문서를 주일만 드렸다가 나갈 때 다시 뺏어가지 말고 주님께 드려라)

2) 두 번째로 본문에서 발견되는 남원북철의 모습은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본문 앞쪽의 5-6절을 읽어보자.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하고 제자들이 요구하자, 예수님은 두 가지 이야기를 하시는데, 겨자씨만한 믿음이야기와 무익한 종이야기를 하신다. 두 이야기는 믿음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다. 5-6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환상을 깨신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이 옮겨지고, 뽕나무가 뽑혀져서 바다에 심겨지는 일이 일어나면 믿음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들은 큰 믿음도 필요 없이 그저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가능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지고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참 믿음인 것이다. 믿음은 기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본문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믿음을 더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말씀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말씀드렸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강하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순종이 필요하다. 믿음에는 당연히 순종이 따른다. 믿음과 순종은 한쌍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믿을만한 사람의 말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주고 따르지 않는가?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그건 믿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불법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반대개념이다. 불법을 행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 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라. 우리의 믿음이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삶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날 교회당 숫자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아니다. 오늘날 설교를 들을 기회가 부족해서 예수를 못 믿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하는가? 예수 믿는 우리의 행함이 약하기 때문이다. 찬송 소리, 기도 소리, 설교 소리는 높아도 믿는 성도들이 성경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는 남원북철의 모습이 우리 모습은 아닌가?  믿는 대로 살고, 믿는대로 순종하기 바란다.

3) 세 번째 본문에서 발견되는 남원북철의 모습은 “입으로는 은혜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율법 가운데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본문은 성경의 다른 본문과 무척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달란트비유나 므나비유를 기억하시는가? 달란트비유말씀에서는 수고하고 충성한 종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수고한 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정반대의 말씀이 나온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땀흘려도 하나님께 보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어느 말씀이 맞고 어느 말씀이 틀리는가? 오늘 본문말씀이나 달란트비유나 므나비유 모두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본문 앞쪽과 뒤쪽의 말씀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앞쪽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490번의 용서가 가능한가? 사실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불가능에 가까운 무거운 짐이었기에 그들은 마음에 시험이 들어서 주님께 나아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누구를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죄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490번 용서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시는 말씀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뒤쪽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고침받는 말씀이 나온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한 일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즉 은혜를 구한 것뿐이다. 그들은 고침받을 만한 어떤 공로, 행위를 한적도 없다. 오직 그들은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도록 간절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므로 그것 역시 은혜에 관한 말씀이다.

무익한 종에 관한 이야기 역시 은혜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은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인즉, 종이 아무리 충성하고, 수고해도“행위나 공로”로는 하나님께 보상을 받을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왜? 우리가 그렇게 수고해도 보상이 없는 것은 은혜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봉사와 헌신은 은혜입은 자의 마땅한 반응이다. 본문 각 문장의 끝에“말할 자가 있느냐 /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 말씀은 그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종의 고백 역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봉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이지, 복받는 통로가 아니다. 뭘 받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았기 때문에 봉사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도 많이 하면, 봉사 많이 하면, 헌금 많이 하면 축복하실 것이라는 공로주의, 율법주의가 교회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타협을 한다. “하나님, 제가 여기까지 하면 이렇게 해주세요. 네? 그것도 안되면 여기까지 할테니 이만큼 해주세요.”문제는 타협이란, 쌍방간에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채 마음대로 기준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봉사 및 구제 등을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람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도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하물며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짐을 당한 엄청난 선물을 받았음에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충성과 봉사를 댓가로 다른 것들을 주님께 요구하고 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칭찬을 바라고, 댓가를 바라는 것은 뭔가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안에 살아가야 할 성도들이 입으로는 “은혜, 은혜”하지만, 실제로는 율법, 율법하면서 산다면 이 역시 남원북철하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복을 받게 되든지간에 그것이 우리의 공로, 수고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선행과 봉사는 아무리 훌륭해봤자 불완전할 따름이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그런 선행과 봉사의 수고는 고작 더러운 옷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 우리의 공로, 또는 봉사를 어여삐 보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지, 우리의 공로, 봉사, 선행 때문이 아님을 기억하라. 지금 혹시 은혜 가운데 살지 못하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바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기 바란다.

정리하겠습니다.
2008년 3월 허리디스크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내 왼쪽 병상에는 술에 취해 자기 집 담을 넘다가 그만 잘못 넘어 꺼꾸로 떨어져서 머리가 깨져 기억상실증에 걸린 청년이 입원해 있었다. 내가 입원해서 퇴원하기까지 10여일 동안 내내 나는 끊임없이 똑같은 소리를 바로 옆에서 계속 듣고 있어야 했다. “이름이 뭐야? 생각나?”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주소가 어떻게 되요?” “여기가 어디예요?” 의사, 간호사뿐 아니라, 찾아오는 모든 그 환자의 손님들과 친척들은 모두 동일한 질문들을 했다. 그의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다. 나는 바로 옆의 침상에 있었기에 맨날 똑같은 질문을 계속 듣고 있어야 했고, 너무나 괴로웠다. 그런데 그 질문들이 점점 내 마음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

※ 언제 어디서나 사람이 자기 정체성, 즉 ‘내가 누구인가?’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 중요한가?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것이지?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지? 내가 가는 이 길이 정말 내가 가야할 길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착각하게 되고 결국 엉뚱한 곳을 향해 가게 된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여러분, 여러분도 스스로 마음속에 질문해 보라. “나는 누군가?”나는 바르게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길로 가고 있는가? 나는 종인가? 아니면 주인인가? 나는 순종하는 삶을 살았는가? 아니면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는가? 나는 은혜아래 살고 있는가? 아니면 율법 아래 살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종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살지 않고, 은혜가운데 살지 않고 행위와 공로를 중시하며 축복만을 바라고 기복적으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목적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데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이 시간 여러분이 서 있는 현 위치를 발견하시게 되길 바라고 잘못된 곳에 서 있다면 방향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섬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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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최민환글쓴이
    2009.2.4 12:37 댓글추천 0비추천 0
    한국에 있을 때 했던 설교입니다. 그리고 제가 심천으로 오기전에, 심천사랑의교회 제직회에서 저에게 설교동영상을 원하셔서 유일하게 동영상으로 남아있는 설교영상이어서, 심천에 보내드렸던 적이 있는 설교입니다. - 최민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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