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주시는 주님(마26:14-25)
▶길을 가던 스승과 제자가 한 농장 입구에 도착했다. 농장은 넓고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겉모습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스승이 농장 한가운데 있는 낡은 집 문을 두드리자, 세 아이를 둔 부부가 그들을 맞이했다. 가족은 더러운 누더기 차림이었다.“이곳에서 어떻게 생계를 꾸려 가십니까?”집주인은 대답했다.“우리에겐 매일 몇 리터의 우유를 만들어 주는 젖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우유를 팔거나 다른 먹을거리로 바꾸고 남은 걸로 치즈나 버터를 만듭니다.”스승은 집주인 대답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제자에게 말했다.“저 집 젖소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거라.”“하지만, 그 젖소는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입니다.”그러나 스승은 말이 없었다. 제자는 어쩔 수 없이 농장주인 몰래 젖소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렸다. 몇년 뒤 제자는 그 농장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제자는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 어떻게 농장을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물었다. 집주인이 말했다.“우리에게 젖소가 한 마리 있었죠. 하지만 어느 날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장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잘라 내다 팔고 새로운 묘목을 심었지요. 그뒤 면화농사까지 지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젖소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스승은 농부에게 열심히 살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기회를 주신다. 물론 그 기회가 기회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주시는 기회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첫째,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을 때에도 반드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은30세겔을 받고 팔기로 하고,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은 그가 배신할 기회를 찾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 21절에 예수께서 식사하실 때에,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근심했다.“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기 시작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길,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제가 좋을뻔 했다.> 주님의 말씀은 <날 배신하는 놈은 반드시 찾아내 죽인다. 그런놈은 태어나지 말았어야했어.>하시는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주님을 배반하려는 가룟유다에게 회개할 기회,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기회를 발로 차버린다. 그는“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다. 주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건만 그는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는 아닌 것처럼 묻는다. 이미 마음이 마귀에게 먹힌 것이다. 가만보면, 이미 그가 예수님을 더이상 신앙의 대상으로 보지 않음을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알게된다. 25절에“랍비여”라고 부른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22절에“주여”즉, 퀴리오스라고 부르는데, 유독 유다만 “랍비”라고 부른 것이다. 더 이상 주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가롯유다는 주님곁에 있었다. 그는 늘 주님과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 역시 그럴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새벽기도까지 나오는 열심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안에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가 있을수 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도 잘못하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오늘 기회를 다시 주시는 주님앞에 다 내려놓을수 있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 지금 내려 놓읍시다.
■둘째, 섬길 기회를 주신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을 지낼 곳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18절에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라.
“성안 아무에게 가서”라고 말씀한다. 이 “아무”는 무슨 뜻인가? 불특정다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만나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특정 인물”을 의미한다. 마태는 그의 이름을 숨겼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럴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주님께서 마음에 정해놓으신 사람이 있으셨다다는 것이다. 그 집은 마가요한의 집이었다. 여기서“아무”는 마가의 부친을 의미한다.
주님은 말씀하시길, “우리 선생님이 자기 때가 가까왔으므로 제자들과 함께 댁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하여라”고 전하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주님은 어떤 사람을 지정해서 그에게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
성경에 보면, 주님은 늘 우리에게 섬길 기회를 주신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당나귀의 주인에게 섬길 기회를 주신다. 또한 마리아에게 향유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신다. 주님은 그것을 만류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자기의 무덤으로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셨다.
▶어떤 분들은 목사에게 식사를 대접을 하면서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식사를 섬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돈을 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또 어떤 분들은 자기시간과 돈으로 교회의 봉사를 하면서도 오히려 자기에게 봉사할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왜 그런가? 그 봉사를 주님 섬기라고 주신 기회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이땅에서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은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임을 믿기에 오히려 감사할수 있는 것이다.
▶사실 목사에게 고민이 없지 않다. “직장과 가정에서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힘든 성도들에게 교회봉사활동까지 하라니, 너무 뻔뻔한 것은 아닌가?”하고 마치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는 것같아 미안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미안하지 않다. 왜냐하면, 봉사를 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 대상은 교회나, 목사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봉사를 함으로 유익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다. 받는 사람보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은 곧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시겠노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인생에 복이 된다. 섬기는 일은 주님께 쓰임받는 일이며, 동시에 내가 복받는 길이다.
그러므로 봉사할수 있을 때, 섬길수 있을 때, 헌신할수 있을 때 하라.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십시오.
▶길을 가던 스승과 제자가 한 농장 입구에 도착했다. 농장은 넓고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겉모습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스승이 농장 한가운데 있는 낡은 집 문을 두드리자, 세 아이를 둔 부부가 그들을 맞이했다. 가족은 더러운 누더기 차림이었다.“이곳에서 어떻게 생계를 꾸려 가십니까?”집주인은 대답했다.“우리에겐 매일 몇 리터의 우유를 만들어 주는 젖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우유를 팔거나 다른 먹을거리로 바꾸고 남은 걸로 치즈나 버터를 만듭니다.”스승은 집주인 대답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제자에게 말했다.“저 집 젖소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거라.”“하지만, 그 젖소는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입니다.”그러나 스승은 말이 없었다. 제자는 어쩔 수 없이 농장주인 몰래 젖소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렸다. 몇년 뒤 제자는 그 농장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제자는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 어떻게 농장을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물었다. 집주인이 말했다.“우리에게 젖소가 한 마리 있었죠. 하지만 어느 날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장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잘라 내다 팔고 새로운 묘목을 심었지요. 그뒤 면화농사까지 지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젖소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스승은 농부에게 열심히 살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기회를 주신다. 물론 그 기회가 기회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주시는 기회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첫째,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을 때에도 반드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은30세겔을 받고 팔기로 하고,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은 그가 배신할 기회를 찾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 21절에 예수께서 식사하실 때에,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근심했다.“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기 시작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길,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제가 좋을뻔 했다.> 주님의 말씀은 <날 배신하는 놈은 반드시 찾아내 죽인다. 그런놈은 태어나지 말았어야했어.>하시는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주님을 배반하려는 가룟유다에게 회개할 기회,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기회를 발로 차버린다. 그는“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다. 주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건만 그는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는 아닌 것처럼 묻는다. 이미 마음이 마귀에게 먹힌 것이다. 가만보면, 이미 그가 예수님을 더이상 신앙의 대상으로 보지 않음을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알게된다. 25절에“랍비여”라고 부른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22절에“주여”즉, 퀴리오스라고 부르는데, 유독 유다만 “랍비”라고 부른 것이다. 더 이상 주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가롯유다는 주님곁에 있었다. 그는 늘 주님과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 역시 그럴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새벽기도까지 나오는 열심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안에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가 있을수 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도 잘못하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오늘 기회를 다시 주시는 주님앞에 다 내려놓을수 있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 지금 내려 놓읍시다.
■둘째, 섬길 기회를 주신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을 지낼 곳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18절에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라.
“성안 아무에게 가서”라고 말씀한다. 이 “아무”는 무슨 뜻인가? 불특정다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만나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특정 인물”을 의미한다. 마태는 그의 이름을 숨겼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럴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주님께서 마음에 정해놓으신 사람이 있으셨다다는 것이다. 그 집은 마가요한의 집이었다. 여기서“아무”는 마가의 부친을 의미한다.
주님은 말씀하시길, “우리 선생님이 자기 때가 가까왔으므로 제자들과 함께 댁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하여라”고 전하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주님은 어떤 사람을 지정해서 그에게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
성경에 보면, 주님은 늘 우리에게 섬길 기회를 주신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당나귀의 주인에게 섬길 기회를 주신다. 또한 마리아에게 향유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신다. 주님은 그것을 만류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자기의 무덤으로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셨다.
▶어떤 분들은 목사에게 식사를 대접을 하면서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식사를 섬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돈을 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또 어떤 분들은 자기시간과 돈으로 교회의 봉사를 하면서도 오히려 자기에게 봉사할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왜 그런가? 그 봉사를 주님 섬기라고 주신 기회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이땅에서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은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임을 믿기에 오히려 감사할수 있는 것이다.
▶사실 목사에게 고민이 없지 않다. “직장과 가정에서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힘든 성도들에게 교회봉사활동까지 하라니, 너무 뻔뻔한 것은 아닌가?”하고 마치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는 것같아 미안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미안하지 않다. 왜냐하면, 봉사를 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 대상은 교회나, 목사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봉사를 함으로 유익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다. 받는 사람보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은 곧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시겠노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인생에 복이 된다. 섬기는 일은 주님께 쓰임받는 일이며, 동시에 내가 복받는 길이다.
그러므로 봉사할수 있을 때, 섬길수 있을 때, 헌신할수 있을 때 하라.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십시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