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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2020-7-21 큐티말씀 - 좋은 믿음이란(눅 7:24-35)

사무간사22020.07.24 16:18조회 수 2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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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 7:24-35
제목: 좋은 믿음이란

 

첫째, 영적인 시력이 좋아야 한다.(24-26절)

사람들이 광야로 갔던 이유는 세례요한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요한이 전파하는 천국복음을 듣고 회개의 세례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복음도 듣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도전했지만, 아무도 바뀐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24-26절에 세 번이나“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고 반복해서 질문하신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이 변했냐는 것이다. 그런데 기껏 광야까지 가서 엉뚱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구경하고, 좋은 옷 입은 사람이나 구경하고 왔다면, 그것은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만 보고 온 것이 아니냐는 말씀이다. 몇 년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왜 교회에 나오냐?”는 주제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구원과 영생 때문이라는 대답은 31.6%에 불과하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대답이 38.8%, 성공과 축복을 위해서라는 대답이 18.5%였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믿음과 구원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교회 안에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질적 번영과 외적인 복을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려고 교회를 나오는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또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인가? 성도는 교회에서 진리의 주님을 발견하고 만나야 한다. 성도는 영적인 시력이 좋아야 한다. 성도는 보아야 할 것은 제대로 보고, 보지 않아도 좋은 것은 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좋아진다.

 

둘째, 주님의 평가가 좋아야 한다.(26-30절)

우리는 누군가를 평가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동일한 사람이라도 그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동일한 사람에 대해서 평가가 달라지는 이유는 <사람의 눈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33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더니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귀신들렸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34절에 주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평가했다. 모두 바르지 못한 잘못된 평가이다. 사람의 평가는 정확하지 못하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정확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평가하셨다. 주님은 세례 요한을 <큰 자>로 평가하셨다. 왜 세례요한이 큰 자인가? 세례요한은 화려한 왕궁에 살지 않고 빈들에 살았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낙타털옷을 입었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왜 큰 자인가? 27절에“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즉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큰 자>라고 평가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가 사는 곳(거주지), 그가 입는 옷, 먹는 음식 등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외적인 것으로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다. 여러분은 사람이 보기에 <큰 자>인가? 아니면 주님이 보시기에 <큰 자>인가? 주님께로부터 큰 자라고 평가받는 믿음의 성도가 되라.

 

셋째, 영적인 반응이 좋아야 한다.(31-35절)

주님은 아이들이 시장에서 놀이하는 것을 비유하셨다. 한쪽의 아이들이 노래하면, 다른 한쪽의 아이들은 거기에 맞춰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놀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노래하는 쪽에서 결혼식 노래같은 신나는 노래를 부르면 반응하는 쪽에서는 춤을 추어야 하고, 장례식 노래같은 슬픈 노래를 부르면 반응하는 쪽에서 울어야 하는데, 그런데 신나는 노래를 불러도 춤추지 않고, 슬픈 노래를 불러도 울지 않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노래하는 쪽을 의미하고, 백성들은 반응하여 행동하는 쪽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사역과 말씀의 분위기가 서로 달랐다. 세례요한은 장례식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즐기는 결혼잔치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셨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바르지 못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거나, 또는 감격하며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반응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때나 오늘날이나 말씀 앞에서 반응하지 않고 <무감각, 무관심, 무감동, 무기력, 무반응, 무표정, 무덤덤>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영적인 감각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반응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여러분은 말씀에 회개와 순종으로 반응하는 살아있는 성도인가? 아니면 예배의 감격도 없고, 구원의 기쁨도 없고, 회개의 눈물도 말라버린 감각이 마비된 죽어있는 성도인가? 반응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그 행위의 열매가 삶을 인정받게 하는 것이다.(35절) 영적인 반응이 좋은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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